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의 공기에서 잠시 벗어나,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엄태준 셰프가 그려 온 솔밤의 공간이 만들어진 과정을 소개합니다.
솔밤은 오픈 1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엄태준 셰프는 유년시절 고요한 사색을 선물했던 안동의 솔밤교 근처 숲을 떠올리며 조용한 가운데 에너지가 느껴지는 정중동의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생명력이 폭발하는 서울 강남구의 한 건물 4층에 둥지를 틀고 손님을 맞이하며 성장해 온 이 공간은 솔밤 팀원들의 정성과 손님들의 마음을 잇고 있습니다. 이곳이 어떻게 기획되고 구현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안동의 소나무 숲
솔밤의 공간은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나요?
레스토랑의 이름과 같이, 안동의 소나무 숲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안동에는 문중을 중심으로 잘 보존된 소나무 숲이 곳곳에 있어요. 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이 절개를 상징해서 널리 사랑받아 왔죠. 어린 시절 안동에 살며 조용한 소나무 숲, 솔밤을 걸어다닐 일이 많았어요. 그 당시 저는 버스가 하루에 4번밖에 안 다니던 외진 곳에 살았어요. 버스를 기다리느니 걸어 가는 것이 나은 선택인 경우가 많았죠. 조용한 소나무 숲을 거쳐 1시간이 넘는 거리를 걷다 보면 자연이 주는 힘에 자연스레 경외감이 생기더라고요. 머릿속을 떠다니던 생각이 점차 가라앉고 오롯이 집중되는 느낌이 좋았어요. 뭐가 되었든, 제 자신을 키운 경험이에요. 거창하게 말하면 사색이라고 할까요.
솔밤을 준비하며 도심 속에서도 잠깐의 여유와 사색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그게 곧 레스토랑의 모티프가 되었고요. 자연은 무섭고, 존경스럽고, 동시에 아름답잖아요? 다가가고 공부할수록 끝이 보이지 않고 더 깊이 알려주는 게 자연이에요. 그래서 그 자연의 힘이 묵직하고 편안하게 표현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2021년 1월부터 이어진 브랜딩, 인테리어 회의들
그 모티프가 구현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자연’,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안동의 소나무 숲’이라는 키워드가 있었지만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자연이 주는 사색의 경험을 가져오고 싶었지, 소나무 그림과 오브제로 가득한 일차적인 표현은 배제하고 싶었죠. 그 당시에 건축 디자인 상을 받은 공간도 많이 찾아보고, 레퍼런스로 삼을 만한 곳들을 스크랩도 많이 하고, 조명이나 소재, 인테리어 스타일까지 다양하게 보았지만 딱 답이 떠오른 것은 아니에요.
저는 갤러리를 정말 좋아해요. 오랜 시간 다양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제가 진심으로 즐기고 매혹되는 것 속에 답이 있더라고요. 미술관의 분위기가 좋았어요. 그 안에 설치된 가변적인 작품들이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며 늘 새롭게 변화하되, 사람들이 조용히 집중하며 움직이고, 자신만의 감성을 느끼는 공간이 주는 매력이 제가 원하던 것이었죠. 그 전체적인 느낌이 정말 좋더라고요. 제가 작품 하나하나를 완벽히 좋아하지 않아도, 미술관의 공기와 분위기, 사람들의 모습이 주는 감성이 해답으로 다가왔어요.
실제 공사 전 3D 모델링 이미지
‘미술관’을 어떻게 공간에 녹여 내셨나요?
조용하지만 침묵하지 않고, 그 가운데 움직임과 감정이 가득한 곳이 미술관이라고 생각해요. 집중하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있고요. 그래서 최대한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되는 깔끔하면서도 안정적인 환경을 만드는 미술관처럼, 저희도 식사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화이트 톤의 편안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물론 저희는 미술품이 주인공이 아니라 음식이 포인트가 되죠. 여기에서 전체적인 솔밤의 이미지가 시작되었어요. 미술관의 매력은 트렌디(trendy) 하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타임리스(timeless)’ 라고 보는데요, 심플하게 정제한 세련미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야 공간을 채우는 스탭과 음식의 변화무쌍함이 자연스레 포용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저는 여력이 된다면 미술관, 복합문화공간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뉴욕 MoMA의 Modern이나 싱가포르의 Odette처럼요. 물론 아직도 그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지역에서 그런 공간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고 결국 여기에 터를 잡았죠. 하지만 전반적인 의도는 충분히 실현되었다고 봐요. 도시의 소음으로 가득한 대로와 인접한 건물이지만 이곳에 들어오면 그 모든 배경을 잊은 듯 조용하면서도 집중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저희 음식에 오롯이 집중하고, 사람들의 에너지가 느껴질 수 있다면 성공적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포인트를 즐길 수 있을까요?
저희 레스토랑은 비교적 차분한 톤이에요.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 위로 핀 조명이 떨어지게 만들었어요. 벽에 걸린 미술 작품에 조명을 비추는 것처럼요. 미술관에서는 벽면에 작품을 걸지만, 저희는 레스토랑이니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올리잖아요? 잘 보시면 벽의 소재와 테이블의 소재가 같아요. 테이블 틀을 만든 뒤 벽과 같은 소재로 제작해 자연스러운 일체감을 주려고 했어요.
사진 우측, 'ㄱ'자로 길게 자리잡은 서비스 테이블
레스토랑 구성에서 오픈 키친과, 홀의 커다란 서비스 테이블도 눈에 띕니다.
공간 구성에도 의도를 뒀어요. 사실 저희 건물 외관이 별로 멋지지 않아요. 그래서 ‘뭐 이런 곳에 레스토랑이 있어…’라는 기분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셔서 기대 없이 레스토랑 문을 열겠지만, 반전으로 확 몰입되는 느낌을 오히려 받으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처럼요. 레스토랑 문이 열리면 홀에 놓인 테이블이 보이는데, 홀에 자리를 안내받고 앉으면 그제서야 전면으로 완전히 열린 오픈 키친이 보이죠. 시선이 두 번 이동하도록 의도했어요. 음식이 만들어지는 주방과 식사를 하는 홀이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요.
그리고 저희 홀에 위치한 서비스 스테이션을 의도적으로 길고 크게 구성했어요. 레스토랑 홀을 감싸 안아주는 느낌의 커다란 ‘ㄱ’자 모양이에요. 저는 서비스 스테이션도 오픈 키친의 연장선이라고 봐요. 요리사가 요리를 하는 것 뿐 아니라 와인 잔을 핸들링하고, 주류를 칠링해 온도를 맞추고, 기물을 내어 오는 모든 과정까지도 ‘식사를 만드는 순간’이니, ‘키친’의 연장선에 들어가죠. 이렇게 확장된 오픈 키친은 솔밤의 역동적인 에너지를 보여줘요. 손님과 저희들의 열정을 이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하고요. 소믈리에와 매니저, 서버의 행동까지도 레스토랑의 경험 일부가 되는 것이죠.
'확장된 오픈 키친'의 개념
키친 바로 앞에 놓인 이 테이블은 다른 테이블과는 조금 다르네요.
이 테이블은 ‘셰프스 테이블(Chef’s Table)’인데요, 순전히 제 욕심으로 만든 곳이에요. 저는 요리를 하면서도 주방에 매여있고 싶지는 않았어요. 저는 마시모 보투라(Massimo Bottura) 셰프의 팬인데요, 그를 보면 항상 손님들에게 직접 인사를 하고, 활기와 에너지를 전달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더라고요. 저도 파스에서 음식의 퀄리티도 체크하고, 직접 손님들 테이블로 나가 인사도 드리고 싶었고, 그 핵심이 셰프스 테이블이에요. 한 테이블 정도는 제가 본격적으로 더 집중적인 인터랙션과 서비스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어요. 그걸 어떤 분들이 좋아하실까 생각하다 보니 업계 사람들이 오면 이쪽 테이블로 안내를 드릴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고요. 아무튼 셰프와 대화를 나누고, 레스토랑의 속살을 더 경험해 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셰프스 테이블이 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위치도 보시면 주방에서 음식이 계속 나오는 파스 바로 앞이잖아요? 저는 이게 셰프의 자신감이라고 봐요. 위생, 홀과 주방의 커뮤니케이션, 분위기, 모든 것에 거짓이 없고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니까요. 레스토랑의 가장 응집된 에너지가 느껴지는 자리이기도 하고요. 저희가 키친에서 아주 시끄러운 편은 아니지만 너무 고요하고 숨막히는 분위기는 지양해요. 자연스러운 솔밤의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을 거에요.
미술관에서 모티프를 얻은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
공간에서 실제로 운영을 하며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셀 수도 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웃음) 일단 제가 고집을 부려서 이렇게 하얀색 레스토랑을 만들어서, 매니저에게 너무 미안해요. 이 흰색을 청결하고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이 정말 말도 안 되게 힘들더라고요. 다른 레스토랑의 2배도 아니고, 한 8배 정도는 더 노력이 들어가는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이렇게 깨끗하게 관리해줘서 늘 감사하고, 그래서 이사를 가더라도 또 흰색을 선택할 것 같아요. 하하하.
또, 층고의 한계가 있는 곳에서 개방형 서비스 스테이션을 보여준다는 것이 어려운 점도 많더라고요. 소리가 울리는 부분처럼 식사에 방해 요소가 될 수 있는 부분을 관리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건물 자체의 단열이나 냉난방 문제처럼 정말 사용하면서 느껴지는 실질적인 불편함들을 계속 해결해 나가고 있어요.
앞으로 솔밤의 공간은…
레스토랑의 경험은 명백히 공감각적인 것이에요. 단순히 음식으로만 경험이 끝난다면, 배달을 해도 같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듯이요. 레스토랑 공간의 분위기, 조도, 빛의 굴곡, 전체적인 톤, 크고작은 레스토랑 특유의 소리, 향기..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를 만들어요.
저희가 준비한 공간에서 팀원들의 에너지를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간으로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지금의 목표에요. 저희의 의도와 기획이 어떻게 하면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전달될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고요.
셰프들은 다 같은 말을 해요. 최고의 인테리어는 손님이라고요. 즐거운 순간에, 저희를 찾아 주신 분들이 좋은 기억을 남기고 가실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는 과정이 이 공간을 완성해 나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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